하기 싫은 건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라 늘 내 멋대로 살려고 했다.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어 해방될 생각만 했다. 이렇게 하기 싫은 일을 많이 해야 하는 학교와 가정이라는 곳만 졸업하면, 정말이지 이 목 졸린 느낌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일찍 독립했다. 입학금 이외에는 내가 대학 4년간 아르바이트와 학자금 융자, 근로장학금 등을 통해 학비는 물론 용돈도 다 벌어서 썼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인격적으로도 독립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 살다 보니 이전에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어른들도 다들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었다. 하고싶은 일은 못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인생. 반항만 못할 뿐, 모두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계속 그렇게들 살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어른들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했던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단지 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학에 가서도, 졸업 후 회사를 다닐 때도, 만화가가 된 후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하기 싫은 일들을 많이 해야 하는 삶이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만화가가 내 꿈이 맞았지만, 이 복잡한 직업의 모든 작업 과정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도 싫어하는 일도 분명히 있었다. 가령 스토리 짜는 일은 신났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스토리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한 스토리와 이미지를 제일 손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였는데, 정작 스토리 만드는 시간보다 그림 그리는데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쓰다보니 그림이 싫어졌다.
몇 년을 하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오디션]이라는 만화의 연재를 너무 힘들게 했고, 우울한 가운데 진행한 작품이니 결과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가라는 직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다 처분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때가 32살이었다. 남들은 내가 만화가로 성공했다고 생각할 무렵, 난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쉬는 동안 소설을 썼다. 그게 [the 클럽]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막상 머리 속의 이미지를 그림이 아닌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없는 글솜씨라는 또 다른 재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은 만화보다 더 어려웠다. 그래서 만화를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지긋지긋한 그림이지만 내 머리 속에 이미지가 그림으로 떠오르지 문장으로 떠오르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좋다. 만화가를 다시 하자. 대신 ‘그림을 그리지 않는 만화가’가 되자.
그 때부터 3D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펜 대신에 마우스를 잡았다.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모든 방법을 다 생각해봤고 시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만화가로 활동하면서 점차 3D 작업의 분량은 늘리고, 손으로 그리는 분량은 줄였다. 결국 지금의 나는 전혀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와 [예쁜남자]라는 작품은 90% 이상이 3D 그래픽이다. 물론 수작업으로 상당히 보정작업을 하긴 하지만 뼈대는 모두 3D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말이 쉽지, 이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 수년간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많이 투자하고, 많이 기다렸는지 모른다.
요새는 일하는 게 재미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제외하곤 많은 부분들을 재능있는 스태프들과 분업해서 작업한다. 나는 하고싶은 일만 골라서 한다. 하고싶은 일이란 곧 잘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니 작업이 신날 수 밖에 없다. 스토리를 짜고, 콘티를 짜고, 캐릭터를 만들고, 색깔을 지정하고, 디자인을 하고, 동작을 잡는다. 이제 나는 스태프들과 함께 만화를 이런 식으로 만든다.
물론 이런 작업방식도 언젠가는 싫어질 것이다. 나는 좀더 그림에서 해방되고 싶다. 만화를 그리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쉬워져야 한다. 미니홈피의 미니미 꾸미기만큼 쉽고 간단하지만 드라마틱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툴도 개발될 것이다. 그런 게 나올 때에 내가 지금처럼 어렵고 비싼 3D툴로 만화를 그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을 리는 없다.
수년 전부터 나의 관심사는 ‘평행우주처럼 수많은 다른 전개를 내포한 이야기’, ‘내가 선택적 주인공이 되어 경험하는 이야기’ 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게임보다는 내러티브가 분명하되 감상자가 시점을 선택하는 능동성을 갖는 것이 내가 기대하고 있는 픽션 이후의 픽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다른 방향의 스토리가 필요하므로 반드시 ‘스토리를 자동으로 써주는 툴’이 필요하고, 수많은 이미지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픽은 게임처럼 변수를 가지고 전개’되어야 한다. 그런 일들을 준비하고 있다.
솔직히 지금 하고 있는 단순한 흐름의 만화에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 사실 이제서야 겨우 3D 기술을 가지고 투자한 결실을 막 거두려는 시점이지만, 또 다른 변화가 절실하다. 나는 늘 더 새로운 게 좋다. 새롭지 않으면 하기가 싫다. 하기 싫으면 잘 할 수도 없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많은 분들도 분명히 하기 싫은 많은 일들에 둘러 쌓여 있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것은 나는 프리랜서이고 조직이 부여한 임무 같은 것도 없으므로 나의 의지로 싫은 일들을 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글은 당장 직장을 떠나라는 제언이 아니다. 직장을 떠나도 여전히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많은 프리랜서들과 자영업자들도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 학교만 졸업하면 당장 자유로울 줄 알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오늘도 나를 살핀다. 내가 이 일을 정말로 좋아해서 하고 있나. 아닌 것 같으면 과감히 버린다. 하기 싫은 일을 단 한 조각이라도 남겨 두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 생각과 실천의 과정 자체가 창작인가보다. 재미있다. 32살 우울증을 안고 다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났을 때와 비교하면, 42살 지금의 나는 참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기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 만화가’도 있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다. 핵심적이고 절대적이라 믿는 것도 제거하는 게 가능하다. 만화에서 그림이 핵심이라고 많이들 믿어 왔지만, 핵심은 창의력이라고 내가 그렇게 재정립하면 되는 거다.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안될 게 뭐가 있겠는가.